우리 교회는 94년형제들 5명이모여 예배를 시작하면서 자생된 형제들중심의 교회입니다. 누구의 교회 모델을 본딴 것도 아니고 자연스레 형제들끼리 모여서 교회가 이루어진 벤처교회입니다.
[1]우리는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고있으며 형제라는 명칭이 교회생활에 커다란 의미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목사,장로라는 직분과 관련된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형제라고 서로를 호칭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고 하셨습니다(히2:11,12). 특히 히2:12(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은 시22:22절을 인용한 구절입니다. 시편22편의 문맥으로 볼 때 22절은 예수님 부활의 상황을 예언적으로 설명한 말씀으로 요20:17절에서 주님이 부활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언을 성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직분은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주님이시라도 낮고 천한 우리를 그 분과 수평관계로 생각하여 형제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동역자를 부목사님, 신부님 이렇게 부르지 않고 모두들 형제라고 불렀으며 시도들끼리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벧후3:15). 성도간에 직분으로 부르는 일은 호칭을 부르는 이와 호칭을 듣는 이 사이에 간격을 낳게 만듭니다. 이는 주님의 본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중세 암흑 시대부터 신학교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주종의 개념이 기독세계를 완전하게 세뇌시켜 버렸습니다. 종교 개혁후에 신학교에서 수업하는 내용은 개혁되었을 지라도 신학교 자체는 지금도 존속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목회자가 시무하는 교파 교회의 역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근대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목회자들이 목사란 명칭을 비판없이 통용되도록 만든 것은 평신도의 책임 이전에 목회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 됩니다. 이는 목사들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게 만든 것인데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겸손히 섬기시기 위해 인간으로 종의 모습으로 오신 성육화의 정신에 근거한 명칭은 아닐 것입니다. 한편 목사라는 명칭은 사대주의 유교사상과 권위주의에 베어있는 우리 한국의 목회자가 pastor를 번역할 때에 엡4장11절을 다른 번역같이 목자(벧전5:4)라고 해야할 것을 변호사, 의사, 판사 같이 사회적인 신분을 강조하다보니 목사라고 번역을 함으로써 유일하게 우리 나라에서만 사용하는 호칭이 되어 버렸습니다. 외국은 목회자들을 부를 때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목사,장로는 기능상의 명칭이지 평시에 이를 호칭하는 것은 원만한 형제관계를 유지하는데 장애를 주게 됩니다. 그장애라는 것은 주종관계로 구분 짖도록 무의식가운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목사는 스스로 높아질려하고 스스로 섬김을 받을려하는 성향이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교회의 지체들과 갭을 만들어서 막역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게 되며 이것은 섬겨야하는 주님의 지도자 상과는 상치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라는 명칭의 사용을 중요시 하고있습니다.
[2]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교회를 섬깁니다. 특히 교회의 KEY가 되는 지체들은 그 역량에 맞춰서 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문 사역자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전문 사역자라는 의식이 있는 경우는 대부분 신학대학원-목사안수-목사의 코스를 가는 형제들에게서 주로 부쳐진 말입니다. 그러한 기존교회는 당회장 위주로 교회 행정을 펴나갑니다. 그러나 직장을 가지고있는 우리는 사역하는데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항상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팀 목회를 하게 됩니다. 일을 혼자 모두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필요한 존재로 인식을 하여 형제 서로간의 은사를 존중해 줍니다. 자연스럽게 KEY MEN은 일을 분담하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한 개인이 튀어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 분담을 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어린 지체들이 편중하지 않고 다양하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설교 담당입니다. 설교를 혼자 담당할 경우에 직장 일과로 인해 설교준비에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를 돌아가면서 담당합니다. 그래서 형제가 설교로 지치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설교의 내용이 다양하여 지체들이 설교의 내용을 편중됨이 없이 골고루 받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주 중요한 점이며 일반 전문 사역자를 주장하는 기존교회와 다른 면입니다. 찬양 팀도 혼자 인도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주마다 인도 합니다. 만찬 인도도 돌아가면서 인도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의 인도자들도 그룹으로 나누어서 인도를 하기 때문에 인도자들이 분산된 같은 권위를 가지고 인도를 합니다. 한사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팀 사역을 하게 만들며 지체들은 하나됨 안에서의 다양한 공급을 받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팀 사역을 할 경우에도 한가지 중요한 체험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회장 제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 당회장은 우리 주님 한 분 뿐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로는 당회장이 아니라 목자장이라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는 주님의 자리이기 때문에 비워놓습니다. 그러할 때에 목자들의(key men을 의미함) 부족한 부분을 목자장이신 주님이 많이 메우십니다. 이것을 주님이 우리가운데 자주 임재하신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분이 목자장이심을 나타내는 일이 많습니다. 좋은 어떤 프로그램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주님의 개입하심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자주 체험하는데 우리가 부족하다고 인식을 하는 것이 곧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이러할 때에 주님은 더욱 풍성히 임재하시는 것을 목도합니다.
[3] 우리 교회의 인도자들은 직장을 가지고있는 지체들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어린 지체들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어린 지체들이 성장을 하여서 "나도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서도 직장을 가지면서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인도자로 섬길 수 있다는 비전을 심어주게 됩니다.' 교회를 이끈다는 것은 참으로 성경의 많은 것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디모데서나 디도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인도자가 되지 않고서는 디도서나 디모데서를 체험 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15장과 행전 20장등등 성경의 많은 부분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 모두를 영적으로 적용하며 체험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성경 말씀의 전부를 적용하며 체험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고 개척된 교회를 인도해야만 합니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인 충만한 교회를 온전히, 전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들의 은사가 따로 있고 평신도들의 은사가 따로 있다는 생각은 기존 목사라는 호칭을 받고있는 목회자들의 생각이지 성서적인 것은 아닙니다(딤후2:2 참조). 이것은 니골라당(백성인 평신도를 지배함)의 의식이지 빌라델피아(형제간의 사랑)교회의 의식이 아닙니다. 지체들에게 교회 개척 사역의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서 형제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는 성서적인 것입니다.
[4]우리는 주일 예배를 존귀히 여깁니다. 주일 성수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날을 성스럽게 여기는 일은 구약교회적(율법적)인 모습이지 신약교회적(생명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한편 초대교회도 주일에 모였습니다. AD70년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이후에도 타국에 가서도 안식후 첫날 모였겠지요. 안식후 첫날 부활하셨는데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혹시 그날이 로마가 지배하고있는 세계에서 모두가 모이기에 가장 좋은 공휴일이었기 때문인지는 역사적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매일, 항상, 기도하는 순간 순간마다 기념합니다. 주일 모임은 일요일이 지체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날이기에 그날 전체 모임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모든 지체들이 한 몸으로 모이기 때문에 중요한 모임이 되며 우리는 지체 한사람이 있는 곳보다 특별히 지체 전부가 모일 때에 주님이 더욱 강하게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의 습관을 지양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단지 주일성수를 지키기 위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수가 10명 안팎이 되었던 초기에는 한 지체가 부득불 일요일에 불참할 수 밖에 없을 때는 전체 예배 모임을 토요일에 가진 적도 많았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수가 50명을 향하다 보니 그러한 변경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이라고 말하는 일요일에 전체 예배로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5] 우리는 주일 예배의 순서들 하나 하나를 동등한 비중으로 귀중하게 생각하고있습니다. 설교가 찬양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설교가 간증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찬 시간이 설교보다 못하지를 않습니다. 찬양시간, 주의 만찬및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 설교시간, 간증시간 모두 동일하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동일한 주님이 지체들의 상황에 맞게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임재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제는 찬양 때에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어떤 이는 만찬 때에, 혹은 설교 때에, 혹은 간증 때에 은혜와 주님의 치유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프로그램들 하나 하나에 똑같은 비중을 두고 참여 합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의 진행 상황을 간략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OB팀(결혼한 형제팀) 과 찬양 팀이 오전 10시 이전에 와서 예배를 준비합니다. 찬양 팀리더는 3명이 주마다 돌아가면서 찬양을 인도합니다. 아침 10시 30분에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합니다. 약 30-40분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령과 진실로 찬양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어서 만찬시간이 15분 정도 진행됩니다. 주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십자가를 묵상하고 한 자매가 낭독하는 시편이나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묵상하는 시간을 같습니다. 그리고 45분 정도 설교 말씀을 듣습니다. 그후 한 형제의 사회로 간증시간을 가집니다. 간증시간은 상황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좋은 간증은 설교 말씀보다 그날 더욱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이 시간은 모든 지체들이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 끝나면 약 1시가 됩니다. 그후 성경공부 조별로 나뉘어져서 간단한 식사로 빵과 우유를 먹고 약 1시간 성경 공부에 임합니다. 그리고 조별로 주마다 나눠서 청소를 하고 헤어지는데 우리 교회지체들은 평일에 직장 일로 쉬지를 못하고 운동을 소홀히 할 수 있게 때문에 예배 후에 OB팀(인도자들도 당연히 포함됨)을 중심으로 테니스를 치러 나갑니다. 우리 모두는 주일 예배에서 주님께서 임재하시도록 항상 진실한 기도를 하고 임합니다.
[6]가능할 수 있는대로 우리 교회는 1:1로 지체끼리 연결되어서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골로새서1:28에서 언급하였듯이 각 사람(1인)을 가르쳐서 각 사람(1인)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전체나 소그룹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주님 안에서 해결함을 받아야 되는 분야들을 해결 받을 수 가 있게 되며 이것은 교회를 변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만남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개인 교제를 통해서 그리고 소그룹 모임(주일 성경공부, OB, OG팀,청년팀 모임)을 통해서 그리고 전체 집회(주일모임이나 2달에 한번씩 하는 세미나 집회, 여름 수련회등)를 통해서 변화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 지체를 돌보고 있는데도 인도자들의 시간적인 그리고 수적인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 할 때는 주님이 직접 개입하여서 성도들을 변화시키 시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목자장이시니 당연히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은 인도자들을 준비시킴과 동시에 교회의 새신자들을 오게 하시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7]우리 예은 교회는 루터의 칭의, 칼빈의 예정론, 웨슬리의 경건을 위한 자유의지의 중요성,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 은사주의 신앙인 들의 안수의 역사등 모든 것이 성서가운데 체험될 수 있는 것이므로 모두를 다 수용합니다. 감리교가 장로교를 비판하고 합리주의적인 복음주의가 특정교파의 성령사역를 이단시하는 것등을 지양합니다. 교회사에서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신부인 교회가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근대 교회사의 흐름 가운데 나타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좋은 교리는 취하고 배타하지를 않습니다. 한편 교회사가운데 형제단 소속의형제들이 루터나 워슬레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고 싶습니다. 형제단의 사역도 교회사 가운데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심을 믿습니다. 꿈으로 예언으로 환경의 변화로 내적인 임재하심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은 항상 주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일이 없으며 혹시 배치될 때는 그러한 초자연적인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성령님과 말씀은 동전의 양면으로 우리교회를 인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8] 우리 예은 교회는 십일조원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주님께 헌물하는 신약 교회적인 헌금의 원리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이는 구약 교회적인 성격의 헌금인데 알다시피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정 통치국가로 십일조는 국가적 세금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리고 성소를 위한 십일조, 제사장의 생활을 위한 십일조 3년마다 빈민자들을 위한 십일조로 생각하면 10%가 아니라 25%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즉 구약의 십일조 개념으로 하더라도 25%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금개념이지 마음에 자원하는 심령의 헌금이 아닙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존맥아더 씨의 "헌금의 원리"를 참조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서로 약속과 규정을 정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형제사역을 하는 교회들 모두는 십일조를 신약 교회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헌금을 내는 지체가 주님 앞에서 생각할 때에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무기명 봉투에 십일조라고 기입하지 않고서 생각한 액수의 헌금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구약적인 십일조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전혀 강조하지를 않는데도 형제들이 주님의 몸된 예은교회를 위한 헌금은 참으로 헌신적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9] 예은 교회의 어떤 지체가 세상을 사랑하여서 모임에 성실히 참여하는 문제나 어떤 결정되어야 할 문제나 삶의 행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주님 앞에 불순종한 모습을 보일 경우에 징계를 주기를 꺼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행해 져야만 분별이 없는 어린 지체들이 이러한 것은 나쁘다는 것을 알게되어 좋은 길라잡이의 역할을 하게됩니다. 이일은 성서적이지만 현재의 기존 교회는 징계를 주는 면에서 거의 말씀적인 체험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징계를 받는 사람은 교회가 그리도 많은데 귀찮게 하는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교회로 훌쩍 떠나버리게 되니 교회 입장에서는 교인을 놓치게 될 뿐 아니라 징계 받는 사람이 교회를 떠나면서 교회가 사랑이 없고 용납이 없다고 소문을 퍼트리면서 성도간에 쓴 뿌리를 내는 점도 교회관리 차원에서 무시할 수 없는 큰일이므로 감히 징계를 할 수 가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현실입니다. 한편 목회자의 물질주의, 물량주의를 추구하는 그릇된 목회관도 징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재림 때까지 알곡과 쭉정이가 섞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목회관과 교회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한다는 목회관에 따라 징계의 여부가 결정이 될 것입니다. 징계가 사라짐으로 해서 교회는 갈수록 경건에서 멀어져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에서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징계는 상황에 경중도를 둡니다. 간단한 권면에서부터 근신, 책망, 퇴교등입니다.
[10] 일반 평신도로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훌륭한 형제들이 더 큰 주님의 사역을 위해 신학대학원을 가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되면 본인도 모르게 목사와 평신도의 갭을 스스로 만들고있는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완전한 수평관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형제단 교회를 이루었다면 교회사 가운데 아주 큰 변화를 앞당겼을 것입니다. 그들의 많은 분들은 70-80년대에 선교 단체에서 헌신했던 평신도 사역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들의 마음속에서 그들도 평신도로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당시에는 못했었나 봅니다. 한편 그들이 선교단체에서 나와서 교회에서 교제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있는 분들이 기존 교회의 훌륭한 목사님들이라서 그들을 본받아서 목사의 길로 간 것 같습니다. 선교단체가 우리 교회와 같은 점은 단 한가지입니다. 형제단들이 사역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회는 주님의 몸의 체험이 전인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형제단의 교회가 강하면 선교회가 아마도 교회로 흡수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형제들이 인도하는 교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서 크게 흥황하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